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익명의 누군가에게: 8주간의 익명 편지 후기

별빛색 2022. 3. 17. 18:33

언제인가부터 나는 일상의 설렘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. 그러나 코로나로 움직임이 제한된 지금, 내 주변엔 단기간의 휘발성 설렘들 뿐이었다.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는 설렘을 위해 계속 무언가를 사들였던 것 같다. 쇼핑은 가장 빠르고, 가장 쉽게 나를 기대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.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금세 꺼져버리는 거품 같았다. 우리나라 택배가 좀 빠른가. 짧게는 이틀 만에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 그 설렘은 사라져 버렸다.

그런 의미에서 8주간의 익명 편지는 나에게 마치 어린 시절에나 느끼곤 했던 설렘을 느끼게 해 주었다. 오랜만에 들어갔던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이 프로젝트를 발견했다. 21년 11월, 또다시 한 해가 끝나가는 서운함에 푹 빠져있던 내게 이 펀딩 프로젝트는 새해를 기대하게 만드는 유일한 일이었다. 실제로 그랬다.

텀블벅 펀딩 페이지


22년이 시작되고, 사이트가 오픈되었다. 홈페이지는 생각보다 더 단순하고 아기자기했다. 들어가자마자 웬 문 하나가 나를 반겨주었다. 로그인을 하면 저렇게 문이 열리는 모션이 나타나고, 이내 아늑한 책상이 나타난다. 이곳에서 나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내 삶을 나누기 시작했다. 첫 번째 편지를 손꼽아 기다리면 편지가 도착하고, 한 주가 지나면 다시 새로운 편지가 도착했다. 매번 새로운 한 주를 기대할 이유가 생겼다.


첫 번째 편지를 쓰면서 생각했다.
‘어떻게 하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거나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?’
편지를 쓰면서 이 부분을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. 저 너머 이 편지를 받을 누군가가 나처럼 설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. 그 설렘의 기대에 부합하는 편지를 쓰고 싶었다. 그런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첫번째 편지를 작성했다. 그리고 그다음 주에 나는 내 몫의 편지를 받았다.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깊이 감동했다. 나에게 편지를 보낸 이 익명의 발신자는 마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, 수신자에게 행복과 안녕을 지원해주었다.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. 우리는 서로에 대해 같은 프로젝트를 후원했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알 수가 없었다.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편지 끝에 진심으로 서로의 행복을 빌었다.
‘타이탄의 도구들’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.

나는 공개 강연을 할 때면 늘 간단한 ‘10초 수련법’을 사람들에게 알려준다. 강연장에 모여든 사람들 중 두 명을 선택해 앞으로 불러낸다. 그런 다음 사람들에게 이 두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딱 10초 동안만 진심으로 소원해보라고 권한다. 그러고 나면 모두들 미소를 짓는다. 10초 전보다 훨씬 행복한 상태를 경험한다.
(중략)
나는 평소처럼 청중들에게 110초 훈련법을 가르치고는 재미 삼아 숙제를 내줬다. 내가 강연을 한 날이 월요일 저녁이었는데, 화요일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무작위로 두 명을 골라 몰래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라고 제안했다. 어떤 행동이나 말도 필요 없이, 그냥 속으로 ‘이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’라는 생각만 하면 된다. 이 연습은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는 만큼 들킬 염려도 얼굴이 빨개질 일도 없다. 10초 뒤에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가면 된다. 그것뿐이다.
나는 수요일 아침, 한 여성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.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. “저는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게 정말 고역이었습니다. 지옥이 따로 없었죠. 그러다가 지난 월요일 저녁,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. 그리고 내주신 숙제를 화요일에 했습니다. 그랬더니 그 화요일은 지난 7년의 회사생활 중 가장 행복한 날이 되었답니다.”
그녀가 화요일을 7년 중 가장 행복한 날로 만든 데에는 무엇이 필요했을까? 10초 동안 남몰래 다른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행동을 8번 반복한 것이었다. 그러니까 총 80초 동안의 생각이었다. 이것이 바로 사랑과 친절의 위대한 힘이다.

참 신기한 수련법이다. 이렇게나 간단하면서 동시에 효과적이라니? 나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.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지만, 아주 조금씩, 일상에 변화가 찾아오지 않았을까?

 

이 프로젝트는 8주간의 편지들로 마무리가 되었다. 편지를 작성했던 홈페이지는 오늘 자정에 폐쇄된다. 편지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러 들어갔다가 9주 차의 편지를 발견했다. 사이트가 종료되기 전에 보너스로 작성이 가능했던 답장 기간이었다. 이 편지의 발신인은 5주 차에 내게 편지를 보냈던 분이었다. 그 뒤로 나는 답장을 작성했었는데, 그 답장에 다시 답을 준 것이었다. 내 편지가 힘이 많이 되었다고 했다. 그 순간의 감정은, 뭐랄까..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. 내 진심을 상대방이 알아차려주었을 때, 내 편지가 두고두고 읽힐 비타민이 되었을 때, 그걸 깨달았을 때 너무나 행복했다.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. 그렇기에 어떠한 말도 꺼낼 용기가 있었지만 동시에 어떠한 그 말들을 상대가 받아들여줄지에 대한 약속은 아무도 할 수가 없었다.
안전한 공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. 만약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분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, 8주간 수고하셨고, 같이 참가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. 우리의 글이 서로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, 한 글자씩 모아서 나누었던 자신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일상의 활력이 되었으니까 말이다.

이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, 유년기 이후로 일상에 새로운 설렘을 느꼈다. 내가 무언가를 이렇게 손꼽아 기다린 건 언제였나, 하는 생각도 들었다. 그리고 그 기대감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. 앞으로 미래의 나에게 기대할만한 선물 같은 일들을,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 부스러기처럼 떨어뜨려놔야겠다.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생기도록.

 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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밑은 UNKNOWN 팀의 인스타그램 링크이다. 여기서 매주 ‘이 주의 편지’가 공개되었는데,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매우 많으니 한 번 가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. 현재 정식 출시를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. 올해 안에 런칭이 목표라고 하는데,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.
https://instagram.com/letterunknown_official?utm_medium=copy_link

실제로 받아본 실물 편지 / UNKNWON 인스타그램 페이지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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